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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나서다/스쿠터일본일주

[스쿠터 일본가다] 57일차, 태풍속, 텐트속에서의 하루






밤새 빗속에서 무탈히 잠을 자고 일어 났더니, 역시나 비가 후두둑 거리며 떨어지고 있다. 다행히 자는 내내 텐트안으로 새어들지는 않았다. 저가의 텐트치고 방수능력 하나만은 믿음직 하다. 예비식량으로 사두었던 야키소바 컵라면(청춘의 주식!이라 써져있다. 청춘은 이것만 먹고 살아야 하는가! 후후~)에 물을 부어 아침겸 점심으로 먹기로 한다. 코펠로 끓인 뜨거운 물을 부어두고 불기를 기다리는 동안 돌풍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줄기차게 내리던 비는 가늘어 졌지만 거센 바람탓에 텐트가 휘청인다. 좁은 텐트안에서 가만이 앉아있는 것이 무서울 정도다. 이러다가 텐트 폴이 또 부러지면 어쩌나 싶어 걱정스럽다. 훗카이도에서 부러진 폴대를 수리하긴 했지만, 몇몇 부위에 균열이 생겨있어 절연테이프로 둘둘 감아놓은 상태다.


라면에 부어 놓은 물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이리저리 바람을 따라 휘청이는 텐트의 천정 폴대를 양손으로 받치고 있는다. 손으로 잡고 있어도 택도 없는 강풍이다. 지금껏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강한 바람에 텐트가 들썩이며 이리저리 기우뚱 댄다. 텐트안에 갖힌채 바람을 타고 날아 오르는 상상과 자이로드롭이 떠올라 양팔을 뻗친채 앉아있는 상황에서도 키득키득 혼자 웃어본다. 정말, 폴대가 후두둑 부러져 버려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강풍이다.


10여분간 두 손으로 이쪽저쪽의 폴대를 꽉 부여잡으며 지탱하고 있다가 팔이 아파와서 손을 놓는다. 이토록 빠른 포기라니! 이 얄팍한 인내심. 바람이 불던 말든 일단 불어 터져 새어나오려고 하는 컵라면부터 먹기로 한다. 다 먹고 난 한참 후에도 바람이 잦아들지 않는다. 들썩~들썩~ 휘잉~. 아웃텐트를 살짝 걷어서 바깥을 내다보니 주차장 한 켠에 서있는 스쿠터의 바이크 커버가 절반이상 벗겨져서 바람을 타고 깃발처럼 펄럭이고 있다. 몰아치는 비바람 속에서 단단히 고쳐 씌우고 다시 텐트로 잽싸게 돌아온다. 그 잠깐사이 바짓가랑이가 쫄딱 젖었다.




우중캠핑, 텐트내부





텐트 바깥에는 끊임없이 비가 내린다.





거쎈 광풍이 미친듯이 흔들어 대는 텐트가 불안해서 양 손으로 잡고 있어본다. 텐트 폴대가 또 부러지면 난감하다.

잡고있는 팔이 아파서 금새 포기. 날아 갈테면 날아 가라지.





아침겸 점심으로 먹을 야끼소바 컵라면. 청춘의주식!이라 적혀있다. 

이 라면 너무 거창해.





'청춘의 주식!'이 이 모양이다.





좔좔좔 쏟아지는 폭우속에서 바람에 뒤집힌 바이크 커버.





빗속에서 바이크 커버를 재차 씌어두고 왔더니 바짓가랑이가 금새 다 젖었다.





텐트 폴대와 경사면을 타고 흘러내린 비가 이너텐트 구석으로도 들어올 정도. 

세워둔 스쿠터가 넘어질 정도의 오늘 비바람은 여행 중 최고의 강도다.




1시간 정도 거쎄게 불어오던 바람이 잦아들자 다시 굵은 비가 쏟아진다. 문자메세지로 지금 있는 지역의 일기예보 확인을 동생에게 부탁했더니 '금일-비&구름, 내일-구름' 이란다. 오늘은 도저히 길위로 나설 상황이 안될것 같아 하루 쉬어가기로 한다. 몇 시간 지나자 내리던 비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사이 주변의 초지를 따라 한바퀴 돌아본다. 오전 내내 좁은 텐트안에 갖혀있었던 터라, 잠깐 걸어보는 걸음이 어찌나 시원한지 모르겠다. 어제와 아침나절의 비에 비하면 약하게 떨어지는 지금의 비는 애교수준. 


혼슈 최남단이라 적힌 기념비와 전망대 건물이 바다 끝 쪽에 서있다. 아직도 태풍의 영향으로 거칠게 일렁이는 바다앞에서 한참이나 함께 일렁이다가 텐트로 되돌아온다. 밀린 일기를 정리하고 지도를 들여다보며 경로를 계획하다가 낮잠이 들어 버렸다. 눈을 떠보니 오후 1시 40분. 여전히 거쎈 바람이 불고있고 바깥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텐트 입구를 걷고 슬며시 내다보니 주차장에 세워둔 바이크 커버가 또 다시 벗겨져 있고 서있는 자세가 좀 요상타. 강풍 때문에 지지대를 세워놓은 반대편으로 바이크가 넘어져 있다. 스풋이 스쿠터이기는 하지만 무게가 125kg정도 되는데 이걸 넘겨버릴 정도의 바람이면 대체 얼마나 세게 불었단 말인가.


오후 3시가 넘어서 비가 그친사이, 이곳으로 캠핑 온 3인조 중 한명이 주차장으로 바이크 점검 나온 나를 보고는 "날씨 좋죠?"라며 웃고는 하늘을 쳐다본다. 그의 농담에 피식 웃으며 "네, 그렇네요." 하며 대답을 한다. 

'너무 좋아서 바이크가 날아갈 지경이지...' 

주차장 가장자리의 목재 울타리 쪽으로 바이크를 바짝 붙여서 다시 세워두고 텐트주변에 박아 놓은 팩을 재 점검한다. 평소와 달리 팽팽할 정도로 팩이며 스트링을 유지시켜 놓았음에도 여전히 바람을 타고 텐트가 들썩인다.


일기를 다쓰고나서 책을 한두장 넘기는 사이 4시가 가까워졌다. 어느순간 바람소리가 사라졌다. 바람대신 비가 후두둑 다시 굵게 내리기 시작. 참 종합선물셋트 같은 날씨다. 눈만 내리면 한계절의 날씨를 하룻사이에 다 겪어 보는건가 싶다. 텐트 출입구를 걷고 바깥을 잠시 내다보니 저 멀리 바람불어치는 공원 부지내에 새로운 텐트하나가 들어섰다. 어제까지만 해도 인기척 없던 캠핑사이트에 이로써 4동의 텐트가 들어섰다. 뭐, 나름 열정의 토요일인 것이다.


동생-부모님의 독촉지령을 받은-으로부터 언제즘 집으로 돌아올 것이지를 묻는 문자메세지가 도착했다. 첫 출발을 시작했던 시모노세키로 돌아가 혼슈 일주만을 끝낸다면 1주일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 할 것 같은데, 시코쿠지역과 큐슈지역을 두고 지금도 고민 중이다. 일본 동측의 길은 참 길게 느껴진다. 물론 이늠의 비 때문이다. 사흘이 멀다하고 한번씩 내리는 이 비. 날씨 맑고 아름다운 풍경속에서의 훗카이도는 20일이 사흘 같이 짧게 느껴지더니... 마음이 이렇다. 마음(마음이라쓰고 감정이라 읽는)이라는 녀석은 믿을 수 없는 녀석이다.


오후 늦은 시간이 되자 빗줄기가 조금 약해졌다. 라면과 햇반이 먹거리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과도하게 줄창 섭취한 라면이 지겨워져서 손대기가 싫은 지경이다. 어제 오는 길에 보아두었던 6km 정도 떨어진 곳의 대형슈퍼를 향해 달려간다. 물론 약하게 내리는 빗속이라 시퍼런 슬리퍼와 시퍼런 비옷을 걸치고 달려간다. 


슈퍼를 향하는 도중, 동네 작은 골목길의 교차로에서 할머니 한 분이 빗속에서 스쿠터를 타고 달려가다가 교차하는 차량때문에 내 앞에서 멈춰섰다. 차들이 다 지나가고 다시 출발하려는 순간 기우뚱 하더니 그 할머니가 스쿠터에 탄채로 넘어져서 못일어나고 그대로 누워있다. 바로 뒤에서 지켜보던 나는 깜짝 놀라서 타고있던 스풋을 대충 길가에 세워두고, 달려가서 쓰러진 몸을 덮고 있는 스쿠터부터 치운다. 그제서야 할머니가 몸을 가누며 길바닥으로부터 일어나신다. 제법 큰 사료 봉투에 담긴 짐이 땅에 널부러져 있다. 봉투를 주워서 세워놓은 바이크의 발판 앞에 올려놓자, 정신을 차린 할머니가 나를 얼떨떨하게 바라보고 있다. 스쿠터 발판 놓는 자리에 다리가 놓여있어서 다리를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다. 할머니도 놀란 마음이 아직 진정되지 않았는지 몸을 서투르게 움직이고 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스쿠터에 다시 올라탄 할머니가 시동을 건다. 연세가 여든은 되어 보이는 백발의 노파다. 넘어지기만 해도 위험한 연세인데 별달리 다친데가 없어보여 다행이다. "고마워요, 다리가..."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넨 할머니가 다시 출발을 한다. 출발한 할머니가 골목길 너머로 사라지는 것까지 보고서야 나도 다시 슈퍼를 향해 달려간다. 요술지팡이가 하나 있다면, 휙 휘둘러서 할머니의 스쿠터 뒷 쪽에 바퀴 하나를 더 달아주고 싶다. 코너에서도 넘어지지 않도록... 하여간, 지긋지긋한 이 비가 여러 사람을 괴롭히고 있다.


대형슈퍼라 역시 식품의 종류가 다양하다. 먹을 만한 마른 반찬과 깍두기 김치와 오이김치, 한국산 김치를 반가운 마음으로 낼름 집어들고 과일까지 사들고 나온다. 간만에 발휘하는 럭셔리(?) 장보기다. 다시 텐트사이트로 향한다. 바다 건너 해안선과 산줄기 사이에서 구름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광경이 빗줄기 사이로 보인다. 내일 날씨가 맑아지기까지 바라지 않는다. 다만 비라도 그쳤으면 더 바랄것이 없겠다. 이 멋진 해안선을 여유있게 지날수 있도록 말이다.


텐트 위로 어둠이 내리고, 후두둑 떨어지는 비는 그칠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쉐인마커의 노래 한곡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면서 누워서 듣고 있다. 퍼쿠션의 소리처럼 들리는 텐트 지붕을 치는 빗방울 소리가 음악과 묘하게 섞여난다. 잠깐 바깥을 돌아다닌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하루종일 엎치락 뒤치락 하며 좁은 1인용텐트 속에 누워있었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이 작은 텐트 속이 한없이 편안해지고 있다. 이 텐트에 정착한것 마냥... 


정작, 정착지라는 것이 있기는 할까? 존재와 존재가 이어져야만 가능한 걸까? 아니면 한번씩 깨달아지는 인생의 순간처럼 단지 순간으로만 남는 걸까. 끊임없이 유동적인 삶 속에서 정착, 그것이 정말 가능할까. 결혼이라는 제도의 수용, 배우자라는 안전장치의 수립,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만들려는 것등의 안전한 장소를 찾고자 하는 폐쇄적인 본능이 아닌 진정으로 정착지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바다와 산을 헤메고 다니면서 한번씩 생겨나던 생각들이 연이어 물고 일어선다. 지금 이순간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는 순간, 그 속성을 짊어진 집이라는 것은 공간이 아닌 시간을 가르키는 추상일지도 모를일이다.


빗속에서 타프를 치고 주말을 맞아 바베큐 파티를 벌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바깥으로부터 빗소리에 섞여 두런두런 들려온다. 

이곳은 혼슈(일본본섬) 최남단의 곶, 그러니까 이틀째 태풍과 비가 지나고 있는... 시오노미사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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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박지 : 시오노미사키 캠핑장(무료)

   -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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