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기 위해 감각이 하나씩 깨어나는 순간, 귀에서 가장 먼저 들려오는 소리는 취사장 지붕으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이다. 비다. 오늘도 역시 비가 내린다. 벌써 6일째 비를 만난다. 누군가는 나이들어 가면 싫어하던 것에게 조차도 익숙해지고 무디어져 간다고 하던데, 나는 아무래도 이 비가 익숙해지거나 무디어지지는 않을성 싶다.
연이어지는 캠핑에서 가장 귀찮은 일 중 하나라면 단연코 새벽에 화장실 가는 것일게다. 역시나 오늘도 새벽동안 캄캄한 어둠을 뚫고 화장실을 가기가 꺼려져서 누워서 버팅기다가 결국은 새벽 다섯시 반이 되어 텐트를 열어 젖히고 바깥으로 나선다. 어둡고 캄캄하며 적막한 밤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 해변의 솔숲은 막연히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깊이를 가지고 있다. 낡이 밝고, 태양의 광입자가 구석구석 부딪쳐서 고유의 파장을 반사시키는 낮 동안에만 그저 평온하고 조용한 해변일 뿐이다.
어둠에 익숙해지기, 불을 만들어내고 지금껏 불을 키워온 인류가 극복해온 가장 원초적인 숙제중의 하나일 것이다. 아파트 속에서 생활하고 있을때는 그 필요성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나, 날마다 캠핑장을 찾아 숙박을 해결하는 생활을 제법 길게 이어온 지금에서야 절실히 느껴진다. 지금의 내게는 어둠 또한 여러경로로 더듬어가며 익숙해져야 할 필요가 있는 대상이 된것이다. 화장실을 향하는 게으른 걸음 위로 가느다란 비가 사르르 내리고 있다.
텐트로 돌아와 잠시 멍하니 앉아있다가, 아침을 간단히 끓여먹고 스풋 주행 1만킬로미터 돌파 기념으로 어제 사두었던 캔맥주를 꺼낸다. 어제 밤에 마시려고 했었는데, 일기쓰다가 엎드린채 잠들어버렸다. 내가 한모금 마시고 스풋의 바퀴에도 한모금 부어주고를 반복하며 뒤늦은 1만킬로미터 주행을 자축한다. 아침부터 이러고 있다. 스풋 녀석에게 고맙기야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정말이지 이 녀석이 없었다면 태평양의 넘실대는 바다가 눈 앞에서 파도치는 일본열도의 한 구석탱이까지 아무일 없이 올 수 있었을까. 300만원짜리 스풋이 내게 3억원 가치를 훨씬 뛰어넘는 자연을 만나게 해주고 있다.
오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떠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시간들을 아득히 지나보내고 파도가 치는 비구름 아래의 어느 곳, 처음 들어보는 지명의 땅덩어리 위에서 맥주캔을 아침부터 들고 서있다. 아침 7시다. 똑,똑,똑,똑, 나뭇가지에 맺힌 물방울이 취사장의 낡은 지붕위에 맑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세상 모든 것들에 언어가 있다면, 빗방울이 떨어져 다른것들에 부딪히는 저 마찰음은 비가 가진 언어의 하나 일 것이다. 살면서 고난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저 유려하고 곧게 뻗은 적송의 실루엣은 또 나무의 언어일테다. 그렇다면 정작 내 언어는 무엇일까.
태평양 바다로부터 한치의 틈도 없는 구름이 몰려온다. 명암의 차이만 알 수 있을 뿐, 하늘은 구름으로 가득 덮혀있다. 오늘도 달리는 내내 추운 날이 될 것 같다. 밀려오는 구름과 함께 애당초 가졌던 원초적인 질문이 떠밀려온다. 나는 여기에 왜, 서있는 걸까. 내 이상향이 길 위의 먼 곳 어딘가에, 바다너머 어느 섬 위에 있다는 것을, 아니 있을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그 생각들을 하기 위해 여기까지나 올필요가 있었던걸까.
모래밭 위로 파릇파릇 자라난 고운 풀들을 바라보며 배낭 주머니에 쑤셔 넣어 두었던 시집을 꺼집어 낸다. 펼쳐들자 곽재구 시인의 싯귀가 눈동자 깊숙히에 와서 박힌다. 잠시 후 차량의 엔진소리가 들려와서 텐트바깥으로 나가보니 어제 접수하시던 관리인 할아버지가 오셨다. 오늘 내린 비에 춥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돼서 와봤다고 하신다. 누군가의 배려들을 평소의 나는 대부분 귀찮아하고 부담스러워 하는 편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고마울 따름이다. 오롯이 혼자여서 일게다.
빗방울도 조금씩 떨어지는 터라 점심까지 여기서 먹고 느긋하게 출발하고자 마음먹는다. 바닷가를 따라 천천히 산책을 하며 돌틈에서 삿갓모양의 따개비를 한웅큼 딴다. 바닷가의 돌틈마다 가득 널려있다. 어머니가 보시면 좋아하시겠다. 칼국수의 진한 국물을 이걸로 맛나게 끓여 내시는 것이 주특기인 분이다. 해안 산책길에 딴 따개비를 깨끗이 씻어서 점심으로 끓이는 라면에 넣어본다. 그런데 비려서 도저히 못먹겠다. 이건 뽀얀 국물이 우려나오도록 오랫동안 삶아야 하는데 잠시 끓이는 것으로는 맛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12시 30분. 비가 아직도 오락가락 하지만 슬슬 출발하기로 한다. 거센 비는 한번 지나갔고 약한 빗줄기만 계속 이어지고 있다. 비옷을 입고 그 속에 카메라를 둘러메고 길을 나선다. 첫번째 목적지는 여기서 멀지 않은 쿠로사키곶이다. 비가 주적주적 내리는 도로를 4km정도 달리자 쿠로사키곶이 나타났다. 북위 40도의 기념탑이 있는 전망대와 쿠로사키 후쿠민슈쿠샤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면 나타나는 전망대를 들린다. 내리는 빗 속을 달려온 답답한 마음이 한방에 사라지며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한 광경이 발 아래로 펼쳐진다. 지금껏 따라 내려오는 이 해안선은 리쿠추해안 국립공원에 속하는 영역이라 바다풍경들이 하나같이 아름답다.
후다이하마 해수욕장 야영장. 비때문에 취사장 아래에 텐트를 쳤다.
후다이하마 야영장. 시멘트 분리벽을 넘어가면 해수욕장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후다이하마 해수욕장 해변
쿠로사키곶 전망대 전경
쿠로사키곶 전망대
쿠로자키 후쿠민슈쿠샤 건물 뒷편으로난 길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면 또다른 전망대가 있다.
후쿠민슈쿠샤 건물 뒷편의 전망대
전망대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해안절경
바다를 향해 폭포가 떨어지는 모습도 보인다.
쿠로사키 등대 바로 뒷쪽에는 북위 40도 기념물이 서있다.
지금 있는 곳을 포함해서 저 정도 위치다. 한반도에서 북위 40도는 익히 알다시피 허리를 가로질러 통과한다.
북위 40도 기념물 옆에는 바다를 향해 종이 달려있다. 이 곳을 찾은 사람들이 함께 종을 칠수 있게 해놓은 배려다.
쿠로사키를 나와 기타야마자키로 향한다. 유명한 관광지라 비가 오는 데도 주차장에는 버스와 승용차들이 제법 들어서 있다. 천천히 걸어서 제1전망대를 거쳐 제2전망대까지 간다. 그 사이의 구간은 내리막길의 계단이 360개로 이루어져 있고 전부 코르크로 덮혀있어 걷는 느낌이 더없이 부드럽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광경이 그야말로 선경이다. 구멍난 기암들이 해안 절벽을 따라 중첩되고 길게 늘어서 있는 모습에 탄성이 절로난다.
2전망대에서 걸어 올라와서 건너편 절벽 위로 보이는 3전망대로 향한다. 제3전망대는 앞의 두 전망대에 비해 보이는 경치가 그다지 시원스럽지 않다. 기타미사키를 나오는 도중, 일본 국립공원의 위치도가 서있다. 잠시 멈춰서서 그간 들렀던 곳들을 하나하나 되집어 보니, 일본의 전체 국립공원 26곳 중 11곳을 지나왔다. 그러고 보면 나도 제법 많이 달려온 셈이다. 스풋을 세워둔 주차장으로 나오니, 내리던 비가 거의 멎어있는 상태다.
리쿠추해안 국립공원의 유명한 해안절경을 볼수 있는 기타야마자키의 제1전망대. 여전히 약한 비가 내리고 있다.
■ 리쿠추 해안 국립공원
리쿠추 해안 국립공원(陸中海岸国立公園)은 일본 이와테 현 북부에서 미야기 현 북부에 이르는 해안선 일대를 차지하는 국립공원이다. 총 면적은 121.98 km²이다. 동일본의 국립공원 중에서는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해안 공원이다. 1955년 5월 2일 지정되었다. 관리상으로는 북부의 미야코 지구와 남부의 오후나토 지구로 분할된다.
리쿠추 해안 국립공원은 북부와 남부가 성격이 다르다. 북부는 전형적인 융기 해안을 이루어 높이 50~200m에 이르는 대규모 해식 절벽이 연속하고 그 사이에 모래 사장 해안을 볼 수 있다. 한편 미야코 시 이남은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이며 육지의 침강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다.
또 중소 규모의 반도가 많으며 비교적 유명한 것으로 오모에반도, 후나코시 반도, 히로타 반도 등이 있다.
출처 : 위키피디아
제1전망대에서의 해안선 풍경
난간 너머로 몸을 내밀고 내려다보면 선경같은 해안선의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온다.
입이 쩌억 벌어지는 아름다운 기암들 위로 산수화같은 분위기의 소나무들이 멋드러지게 자라있다.
구멍이 숭숭 뚫린 코끼리 바위가 일개 소대 정도의 숫자로 늘어서있다.
채찍들고 바다로 한번 몰아내고 싶은 충동이 든다.
제2전망대를 향한다.
제2전망대를 향하는 길에서 보이는 좌측의 해안절벽. 저 위에 제3전망대가 서있다.
제2전망대를 향하는 길은 360개의 계단으로 되어있고, 계단 위에는 걷기 편하도록 코르크가 깔려있다.
걷는 느낌이 무척이나 부드럽다. 계단의 수만큼이나 되돌아올때는 힘든 곳.
제2전망대에서 보이는 해안절벽. 이곳을 찾는 누구에게라도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수려한 풍광이다.
제1전망대에 비해 해안이 훨씬 가깝게 보인다.
이 근처에는 물수리(ミサゴ 미사고, osprey)가 둥지를 틀고 있나보다. 물고기 잡는 매인 물수리는 전 세계에서 멸종위기종이다.
일본에서는 물수리가 잡아서 저장해 두어 발효된 물고기를 사람이 먹어본던 것이 스시의 시초가 되었다는 전승이 있다.
날개를 활짝 펼치면 2m에 달한다. 유명한 등산용 배낭 메이커의 이름도 오스프리(osprey)가 있다.
리쿠추 해안은 이렇게 빨간선을 따라 도보코스가 정비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제2전망대에서 계단을 다시 올라와 제3전망대를 찾았다. 앞의 두 전망대에 비해 전경은 그다지 기대 할 것이 못된다.
키타야마자키 영내의 산책로와 조성림
기타야마자키에서 44번 현도를 따라 가는 는 도중의 해안선풍경
기타야마자키 같은 화려함은 덜하지만 유려한 해안선이다.
달려온 뒤쪽의 해안선
45번 국도를 향하는 44번 현도변의 풍광
기타야마자키의 황홀한 풍경들을 뒤로하고 다시 44번 현도를 따라 내달린다. 왠일로 국도를 향하는 지방도로에 차량통행이 뜸하다. 그덕분에 여유있게 달리기는 좋다. 다시 45번 국도에 올라타고 쌩쌩 내달리는 차량들 사이를 시속 50km의 속도로 천천히 간다. 바닥이 아직은 젖어있는 상태라 속도를 올리기에는 좀 위험하다. 한참을 내달리자 산노이와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 방향으로 따라가 해안으로 향하자 캠핑장이 보인다.4시 40분. 텐트를 치고 자리를 잡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다. 역시 해안가에 위치한 이 캠핑장도 비수기에는 사람이 상주하지 않는듯 관리인은 보이질 않고 사무실 건물 앞에 전화번호만 붙어있다. 일단 다시 해안을 따라 조금더 가본다. 그랬더니 멋드러진 모습으로 세개의 바위가 바다위에 솟아있는 산노이와가 나타난다. 잠시 산책로를 따라 바다가까이로 내려가 본다. 명승지인 산노이와 바위도 멋있거니와 건너편의 해안선의 풍경도 멋드러진다. 퐁퐁 구멍이 뚫린 동굴지형이 건너다 보인다.
산노이와에서 조금더 가보니 어촌마을이 나타났다. 인근의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서 다시 아까 봐두었던 캠핑장으로 향한다. 지는 하늘이 어둑하게 변하고 있다. 그 사이로 파아란 제색의 하늘이 드러난다. 동쪽해안이라 노을을 볼 수는 없지만 넘어가는 해가 남은 빛으로 비추는 적자색의 잔광이 동쪽 바다 위의 구름에 닿아있다. 바닥에 엎드려 잠자던 감성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광경이다. 하늘이 드러나는 걸로 보아 내일은 비가 그칠것도 같다.
텅 빈 캠핑장이지만 다행히 깨끗하게 관리된 화장실은 문이 열려있고, 취사장에도 불이 들어온다. 낮에 내린 비 때문에 땅이 젖어있는 터라, 오늘도 취사장내부의 시멘트 바닥에 텐트를 치고 화장실에서 물을 받아 샤워를 한다. 저녁나절의 쌀쌀한 날씨에는 찬물을 몸에 끼얹기에는 제법 춥다. 아마도 이제부터는 밤이되면 더 추워질게다.
오늘은 고작 80km 정도를 달려왔다. 오늘도 텅빈 캠핑장에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산노이와 인근의 도로에서 보이는 풍경
도로에서 내려다 보이는 산노이와(三王岩)
묘한 모습으로 바다 위에 서있는 산노이와(三王岩)
산노이와가 서있는 해변으로 내려가는 계단
산노이와 맞은편의 해안절벽
두마노하마 캠핑장 앞의 바다, 노을이 물드는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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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박지 : 두마노하마 캠핑장
- 유료/ 관리인이 없어서 무료사용
- 화장실, 취사장
* 여행안내
* 이동거리 및 경로 : 80km
후다이하마 해수욕장 야영장 → 쿠로자키/기타야마자키 → 산노이와 → 두마노하마 캠핑장
큰 지도에서 스쿠터일본일주-41일차 경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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