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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읽다

노독/이문재


* 미야자키현, 니치난(日南) 220번국도변|2013.11.13.|기억할만한 지나침... 




노독


                           이문재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함부로 길을 나서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자에게 주어진 천형(天刑),

영원토록 길을 그리워하게될 운명과 하염없이 길 위를 흐르게될 숙명의 천형.

생의 장소가 점차 낯설어지고, 익숙하게 건넸던 일상의 대화들마저 이질적이게하는 천형.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이면 몸 속에서 떠돌던 차갑고 고독한 파란 독(毒)이

심장근처로 몰려들어 짜르르한 신호를 일으키곤 다시 길 위로 꾸역꾸역 밀어올리며 

풀리지 않는 여독(旅毒)의 통증을 불러일으키는, 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