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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읽다

그대들은 아름다운 시절에 살기를/박정대






그대들은 아름다운 시절에 살기를





허름하고 낡은 롯지 창가에 반가사유상을 올려놓고 술을 마신다


 반가사유상은 어느 먼 옛날 누가 만들었을까

 

비단은 서쪽으로 가고 불교는 자꾸만 동쪽으로 흘러오던 그 시절, 반만 가부좌를 튼 채 생각에 잠겨있던 

이 아름다운 청년은 어떻게 반가사유상 속으로 걸어 들어갔을까

 

영혼은 어디에 두고 왔을까


 나는 반가사유상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다 출출해져 거리로 나선다


 멀리 안나푸르나가 보이는 여기는 마오이스트 해방구 거리


 거리 가득 겨울바람은 매서운데 내가 알던 이곳의 술집과 식당들은 문을 닫고 국밥 한 그릇 먹으러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오랜 왕국을 멸망시킨 그대들의 거리 한 모퉁이에서 나 지금 반가의 자세로 생각하노니


 인민의 행복은 따뜻한 국밥 한 그릇과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유


 아주 낮은 곳으로 내려와 착륙하는 눈발의 계급들


 혁명이란 인민의 외투처럼 쏟아지는 눈발을 따뜻한 국밥과 영혼과 음악으로 바꾸어주는 것


 오랜 왕국의 깃발을 내린 그대들의 거리에서 곰곰이 생각하노니


 나는 소위 그대들이 말하는 역사적 발전을 믿을 수가 없구나


 따뜻한 국밥집 하나 찾을 수 없는 이 차가운 심장의 거리에서 인민이 여전히 배고픔에 떨고 있다면 그대들의 거리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쓸쓸함이 허기처럼 가득한 거리에서 나는 지금 몹시 배가 고프고 추운데 왜 모든 식당들은 셔터를 내렸나


 겨울 저녁 여전히 불 밝힌 안나푸르나와 센티멘털 세탁소의 다리미 불꽃은 밤새 누군가의 외투를 말려주고 있다


 누군가 티베트 독립군 복색을 하고 있다고 국밥 한그릇 내어주지 않는다면 이 거리는 참으로 이상한 편견의 계절에 당도해 있는 것이다


 나는 단지 따뜻한 음식을 먹고 싶을 뿐이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행복한 꿈을 꾸며 잠들고 싶을 뿐이다


 가끔은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또 가끔은 나도 음악을 만들고 싶을 뿐이다


 나는 그대가 아니고 나 자신이기 때문에 나를 꿈꾼다


 마찬가지로 그대는 그대이기 때문에 늘 자신을 꿈꾸지 않는가?


 꿈꿀 수 있는 자유가 없다면 그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 바닷가 조개껍질을 주워 화폐로 사용할 테다


 종이가 없으면 풀잎의 입술에 시를 적고 비가 내리지 않는 날에는 양의 견갑골에 편지를 쓰리라


 누군가 여전히 잠들지 않고 지구라는 별의 한 모퉁이에서 풀잎의 시를 읽고 견갑골의 편지를 읽으리라


 패각 추방의 날들 속에서도 지상의 양식들은 여전히 자랄 것이다


 그러니 누구든 지상의 양식을 독점하려 하지 말라


 그 어떤 이유로도, 그 누구에게도 지구의 식량과 음악과 영혼을 독점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국경이 국경 안의 인민만을 배불린다면 그 국경은 타도되어야 하리라


 지구라는 행성이 인간만을 위해 존재한다면 이 행성은 타개되어야 하리라


 나의 시가 그대의 자유를 억압한다면 나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으리라


 나의 사랑이 그대의 슬픔을 키운다면 나는 그 어떤 사랑도 꿈꾸지 않으리라


 나의 고독이 음악하나 만들지 못한다면 나는 고독의 손톱마저 뽑아버리리라


 그러니 눈발이여, 지금 이 거리로 착륙해오는 차갑고도 뜨거운 불멸의 반가사유여, 그대들은 부디 아름다운 시절에 살기를




- 박정대, 『삶이라는 직업』, 문학과지성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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