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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읽다

빈집#03, 속삭임 [빈 집/기형도]







빈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지워진 후, 다시 시작된다는 그 말,

끝난 사랑에서 다시 언어가 시작된다는 그 말.

나는. 믿으려 한다.


폐허가 된 이후에야, 그저 구조체에 불과했던 

집에게도 들려 줄 이야기가 있었음을

들어차 있던 모든 것들이 홀연 빠져나가 텅 빈 다음에야

그 집 만의 이야기가 흘러 나온다는 것을 빈 집에게 들으며

남루해지고, 다 닳아 사라지더라도

마지막 만은 제 이야기로 세상을 녹여 내겠다고 결심했다.


그것이, 빈집이 내게 들려 준. 짧은 속삭임.





이천, 설성 / 2012.01.03. / 기억할만한 지나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