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읽다
빈집#03, 속삭임 [빈 집/기형도]
기억할만한 지나침
2012. 2. 1. 22:41
빈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지워진 후, 다시 시작된다는 그 말,
끝난 사랑에서 다시 언어가 시작된다는 그 말.
나는. 믿으려 한다.
폐허가 된 이후에야, 그저 구조체에 불과했던
집에게도 들려 줄 이야기가 있었음을
들어차 있던 모든 것들이 홀연 빠져나가 텅 빈 다음에야
그 집 만의 이야기가 흘러 나온다는 것을 빈 집에게 들으며
남루해지고, 다 닳아 사라지더라도
마지막 만은 제 이야기로 세상을 녹여 내겠다고 결심했다.
그것이, 빈집이 내게 들려 준. 짧은 속삭임.
이천, 설성 / 2012.01.03. / 기억할만한 지나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