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읽다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기형도

기억할만한 지나침 2012. 1. 9. 22:33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기형도



가라, 어느덧 황혼이다

살아 있음도 살아 있지 않음도 이제는 용서할 때

구름이여, 지우다 만 어느 창백한 생애여

서럽지 않구나 어차피 우린

잠시 늦게 타다 푸시시 꺼질

몇 점 노을이었다

이제는 남은 햇빛 두어 폭마저

밤의 굵은 타래에 참혹히 감겨들고

곧 어둠 뒤편에선 스산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우리는 그리고 차가운 풀섶 위에

맑은 눈물 몇 잎을 뿌리면서 落下하리라

그래도 바람은 불고 어둠속에서

밤이슬 몇 알을 낚고 있는 흰 꽃들의 흔들림!

가라, 구름이여,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해

이제는 어둠 속에서 빈 몸으로 일어서야 할 때

그 후에 별이 지고 세상에 새벽이 뜨면

아아,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우리는

서로 등을 떠밀며 피어오르는 맑은 안개더미 속에 있다.



■ 




세상이 풀어내는 온갖 이야기들과 만가지 풍경 앞에서

정작 그 이야기들에 닿지 못하고,

그저 외로움과 상실만을, 감탄사만을 담아 쥐고 있다면

그것만큼 아득하고 슬픈 일이 또 있을까.

 

고독하다면 스스로 장엄 할 수 있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하면 

광활함 마저 제 세계에 드리울 수 있는 것.





영월 주천강/2011.10.21./기억할만한 지나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