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나서다/스쿠터일본일주

[스쿠터 일본가다] 52일차, 빗길을 달려 도착한 에도시대 역참마을

기억할만한 지나침 2011. 8. 5. 02:07








밤사이 텐트에 비 떨어지는 소리가 후두둑하며 간헐적으로 들려왔었다. 아침이 되자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흐린 상태다. 비가 올듯 말듯한 하늘이다. 검은 하늘이 아무래도 수상하여 짐을 싸지 않고 텐트 안에서 한참 동안 기다려 본다. 역시나 비가 삼십여분간 내리다가 다시 약하게 흩날리는 수준으로 바뀐다. 비가 내리긴 하지만 지금 상태로만 약하게 내릴것 같은 날씨다.


아침으로 또 라면을 끓여 먹는다. 중화 머시기라 적힌 라면을 뜯었는데, 기름기가 가득한데다 정체불명의 수상한 맛이 난다. 이 라면도 블랙리스트에 올려놓고 다음부턴 촉수엄금 되겠다. 아침을 해 먹느라 받아 놓은 물통을 무심코 들여다 보니 시커먼게 둥둥 떠다닌다. 캠핑장 뒷쪽의 낡은 개수대에 음용금지라 적혀있는 것을 무시하고 어제 밤에 떠와서 사용했더니 이 모양이다.


서둘러 짐을 챙긴다. 텐트를 마지막으로 접어 넣고나자 다시 비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한다. 비옷을 아래 위로 챙겨 입은 후 길을 나선다. 비가 내리는 삼림공원 내의 비포장길을 다시 500m 정도 조심조심 내려간다. 울퉁불퉁한 자갈이 여기저기 깔린 흙길이다. 어제 지나왔던 구불구불한 아스팔트의 임도를 되돌아가 우츠쿠시가하라 고원으로 향하는 178번 현도인 비너스라인으로 되돌아간다.




아침으로 끓여 먹은 중화 머시기 라면. 기름기 많고 오묘한 맛 때문에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대형 식품매장에서 산 김치. 이 정도 양이면 사흘은 먹을 수 있다. 제품명이 호호아줌마도 아니고 호호김치다.





우츠쿠시가하라 현민의 숲 캠핑장 주변. 빼곡히 자란 나무와 개울물 건너편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풀밭이 원래 캠핑사이트이다.





원래의 캠핑사이트를 두고, 화장실과 취사장이 가까운 도로인근에서 텐트를 치고 하루를 보냈다.

출발전 텐트를 걷고 짐정리를 마친다.





캠핑장이 있는 숲을 벗어나기 위해 비포장길을 500미터 가량 내려간다.




임도를 벗어나 현도에 들어서자 약하게 흩날리던 빗줄기가 다시 거세진다. 출발한지 채 30분도 안되는데 벌써 신발은 다 젖어들고, 비가  야금야금 새어 들어오는 품질 나쁜 비옷 바지 탓에 아랫도리가 축축하다. 메쉬재질로 되어있는 장갑도 이미 젖은 상태라 손이 시리다. 10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높은 고원에서 내리는 비라서인지 굉장히 차갑다. 


급한 경사의 지그재그 오르막길을 오르는 도중,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전경이 훌륭하다. 계속해서 내리는 비만 아니라면 잠시 멈춰서 즐기고 가면 좋겠다. 어제부터 달려온 키리가미네 고원에서 우츠쿠시가라하 고원까지 이어지는 이 도로는 역시 알려진대로 전망 하나는 끝내주는 도로이다. 가까이 산다면 틈날때 마다 걷기도 하고, 차로 달리기도 하면서 오랫동안 즐기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길이다. 


한쪽 하늘과 산능선들이 도로 아래로 주욱이어지는 풍경이 흐린날, 피어난 구름과 안개사이로 은은하게 보인다. 비구름에 가려진 이 풍경은 맑은 날의 30%도 못 미칠것 같다. 하늘이 맑은 보통의 날씨 아래 이 길에서 보이는 주변의 풍광들은 대체 어느 정도일까 싶은 궁금증이 일어난다.


오르막 도로 도중 적당한 경사면에서 멈춰선 다음 빗속에서 무리하게 카메라를 꺼내들고 사진을 찍어본다. 흩뿌려지듯 내리는 비 탓에 카메라 바디 위에는 금새 물방울이 맺히고 젖어든다. 비오는 날 사진 찍는 일은 여러모로 귀찮아서 못할 짓이다. 방수가 되는 자그마한 똑딱이 카메라를 이번 여행에 가지고 왔으면 좋았으련만, 단 하나 소유하고 있는 렌즈가 달린 이 무거운 DSLR을 여행의 동반자로 포기 할 수 없었던 나도 참 미련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대개 모든 여행의 짐싸기는 소거로부터 시작된다. 가지고 가야 할 모든 물품들을 주욱 늘어뜨려 놓고, 사용 비중이 낮은 것부터 하나하나 제거하는 그 소거법으로 부터 여행의 한 부분이 시작된다. 나도 한달 가까이 준비한 물품들 중, 수십차례 고민을 하며 집어 들었다가 한쪽 구석으로 밀쳐 놓은 물건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토록 고민하던 짐싸기에서 조차 단 한번도 이 카메라를 빼놓고 올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언제나 길 위로 나설때면 자연스레 나와 함께 길을 걷던 녀석이 아니던가. 그러고 보면 내 좋지 못한 기억력을 지금껏 보완 해 준, 빛나는 땅 위의 한 순간들을 기억하도록 도와준 이 녀석에게 나는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었던가. 몇 장의 사진을 빗속에서 서둘러 찍고나서 젖은 손으로 카메라에 묻은 물기를 대충 털어내고 후다닥 우의 속으로 갈무리 한다. 




우츠쿠시가하라를 향해 오르는 도로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이리저리 휘어지며 올라온 도로가 산기슭 건너편으로 보인다.





고원을 오르다말고 잠시 멈춰선다. 멈추지 않고 연이어 내리는 빗속이다.





고원을 따라 오르는 비탈진 산악도로. 뒤돌아보면 이런 길이다.




다시 빗물이 흘러내리는 경사길을 달려 우츠쿠시가하라 고원의 정상 부위에 도착했다. 뿌연 안개속에서 멈추지 않고 내리는 빗속의 갓길에는 해발 1,905m를 알리는 표지판이 홀로 뜬금없이 서있다. 1,900미터가 넘는 차량도로의 고갯길은 우리나라에서라면 찾아 볼 수도 없지만 지금껏 거쳐왔던 일본의 산악도로에서 해발 1,000미터가 넘는 길들을 몇번이나 지나왔던 터라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엊그제만 해도 2,300미터가 넘는 후지산 산악도로를 달려 오르지 않았던가. 인증샷을 찍기 위해 잠시 내려선 고원에는 비바람과 안개구름이 거칠게 에워싸고 있다.


비에 젖은 장갑 탓에 손이 차가워져 바이크 핸들을 잡고 있는 왼쪽팔이 쩌릿쩌릿하다. 비를 맞으며 달려오는 동안 손발이 젖으며 스며든 한기탓에 몸이 많이 차가워 졌다. 나는 고원과는 그다지 인연이 없거나 궁합이 맞지 않나보다. 오와라세 계류를 지나 만났던 내륙의 고지대에 펼쳐진 토와다코 호수며, 힘들게 오른 자오고원, 독특한 분위기의 분지인 센조가하라 고원, 그 몇되지 않는 고원들을 지나 올 때 한 곳도 빼놓지 않고 모두 차가운 빗속을 달려오지 않았던가. 그걸로 모자라, 오늘 찾은 우츠쿠시가하라 고원에서 조차도 비가 주륵주륵 내리며 몸을 괴롭히고 있다.


내륙의 고원인 이 곳을 향해 달려오는 내내 대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길래 이름이 우츠쿠시가하라 고원(美ヶ原 高原)일까, 하며 기대를 꽤나 했었다. 파란 하늘아래 펼쳐지는 해발 2,000미터 고지에서 360도로 펼쳐지는 전망을 즐기며 너른 고원을 걸어 볼 생각에 마음이 한껏 부풀었었다. 그런데 이늠의 비 때문에 그 기대들은 말짱 황이다. 바이크에서 내려 서있는데도 몸이 얼어 붙을 것 같은 한기가 든다. 이름난 우츠쿠시가하라 미술관과 야외에 전시된 조각 작품들이 안개와 비속에서 가물가물 할 뿐더러, 한기로 편치않은 내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있다. 서둘러 왔던 길을 되짚어 고원을 내려가기로 마음먹는다.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를 곳이지만 추위와 비에 몸이 먼저 질렸다. 마음속의 결정 후, 부리나케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려간다. 어젯밤을 무사히 보냈던 현민의 숲 캠핑장 앞을 지나 마츠모토시로 향한다. 고원을 내려가는 내리막의 경사지고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이나 달려 내려간다. 여전히 비는 그치지 않고 있다. 내리는 비를 피할 만한 곳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산길이다. 




급한 경사의 구불구불한 도로가 끝나자 우츠쿠시가하라 고원이 시작된다. 해발 1,959m의 산악도로.

이젠 이 정도의 해발고도로는 감격(?)하지도 않는다. 





우츠쿠시가하라 고원 미술관. 그치지 않고 내리는 비와 안개 때문에 아름답다고 알려진 미술관 야외 전시장과 산책로를 걸어 볼 마음이 싹 사라졌다.

고원의 길을 둘러보는 것을 포기하고 마츠모토 시가지를 향해 되돌아 간다.

 



비에 지친 몸을 잠시 쉬어가고자 가지가 우거진 나무 아래에서 잠시 멈춰선다. 바이크로 달려오던 때에 비해 비를 훨씬 덜 맞기는 하지만, 잎과 나뭇가지에 맺혀서 떨어지는 굵은 물방울들이 여전히 어깨 위로 뚝뚝 떨어져 내린다. 나무 아래에서 나마 잠시 쉬었더니 몸이 한결 편해졌다. 다시 한참의 내리막길을 달려서 경사가 완만해진 골짜기의 마을을 지난다.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싼 공기에 평온한 온기가 쓰며있다. 역시 고도차이에 따른 온도변화는 무시 못 할 정도인게다. 여름의 무더위를 피하려면 바다가 아닌 산으로 가라는 말을 강력하게 공감하고 있다.


산골마을을 지나며 마츠모토시가 가까워지는 동안 다행히 비가 그친다. 빗물이 그렁그렁 맺힌 젖은 우의를 벚어 재치고 몸에 스며든 물기를 대충 닦아낸다. 추위에 떨면서 길을 달려온 탓인지, 못견딜 만큼 급격한 허기가 느껴진다. 길가에 멈춰선 채로, 비상식량으로 챙겨둔 삼각김밥을 꺼내어 정신없이 흡입한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그제서야 체온이 정상적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느껴진다. 훗카이도를 벗어나 혼슈로 들어온 다음날 부터 시작된 이늠의 비는 어쩌면 이렇게도 하루걸러 하루씩 끊이지도 않고 쏟아져 내리는지 모르겠다.


마츠모토 시가지까지 8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나온다. 계곡의 길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 양옆으로 마을들이 정갈하게 위치하고 있고, 산중턱에는 막그친 비를 뿌려대던 구름의 잔재들이 나직하게 흘러지나고 있다. 마츠모토 시가지가 길 아래로 보이기 시작한다. 




우츠쿠시가하라 고원에서 마츠모토 시를 향해 내려가는 산길. 첩첩의 산들이 내리막 길 옆으로 보인다.





이런 길을 주욱 이어 산길을 내려 간다.





비에 젖은 몸의 한기가 점점 심해진다. 내리막 길 도중의 무성한 가지를 늘어뜨린 나무 아래에서 잠시 멈춰 쉬어간다.





한참을 달려 내려오자 드문드문 보이던 농가가 산기슭을 따라 소복히 모여 있는 마을이 나타난다.





마츠리에 사용한 제구가 도로 옆에 놓여있다.





연신 내리던 비가 그윽하게 휘어지는 마을길을 지나며 그쳤다.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마츠모토시가지를 향해 달려간다.





도로옆 옹벽 가운데에 놓인 조그마한 석상이 눈길을 끈다.

불상이나 보살상이 아니라, 손을 잡고 있는 부부의 모습처럼 보인다.





고원에서부터 급한 경사로 이어지던 내리막길이 완만해지자, 평화롭고 고요한 마을의 풍경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시커멓게 끼어있던 비구름이 달려가는 방향의 하늘에서부터 조금씩 걷히고 있다.





마츠모토 시가지가 길 너머로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시내길로 접어들어 마츠모토 성으로 향한다. 길 우측에 동전세탁소(코인란도리)가 보인다. 황급히 멈춰서서 세탁소로 들어간다. 며칠째 밀린 빨래와 젖은 옷가지류를 한꺼번에 밀어 넣는다. 세탁소 한쪽 귀퉁이에 서서 입고있던 바지까지 벗어 세탁기에 집어넣고 나니, 밀린 숙제를 한방에 해결 한 듯 마음이 가볍다. 세탁기 표시창을 보니 건조가 완료될때까지 40여분이 남아있는 상태다. 그 사이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우중충하던 구름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파랗게 맑은 하늘이 열리고있다. 40여분 멍하게 기다리는 시간을 알뜰하게 활용하기 위해, 5분 거리에 있는 마츠모토 성으로 가보기로 한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그 시간동안 잽싸게 성을 돌아 본 후, 되돌아오면 딱 맞을것 같다.


주욱 직진하는 시내도로를 달려, 마츠모토 성 바로 앞에 있는 경찰서내의 주차장에 바이크를 대고(경비아저씨가 바이크 주차장 위치를 알려준다) 해자를 건너 성으로 들어선다. 성문을 지나 들어선 내부에도 근엄하게 쏫아있는 천수각(본성 중앙의 망루)을 둘러싸고 해자가 하나 더 둘러싸고 있다. 내부의 해자를 건너 성 천수각으로의 출입은 유료라 포기하고, 내해자를 따라 빙둘러 걸으며 멋드러진 성의 모습을 사면에서 구경한다. 마츠모토성은 독특하게도 평지에 쌓은 성채로 일본 전국시대의 유명한 축성기술자인 이시가와 카즈마사 부자가 1953년에 세운 성으로 일본의 국보로 등록되어 있을정도로 잘생기고 유서 깊은 성이다.


평일임에도 성을 보기위해 찾은 사람들이 제법 많다. 서양인들도 여기저기 보인다. 비가 거칠게 내리던 한 시간 전의 상황을 짐작조차 할 수 없게하는, 파란 하늘이 성 위로 맑게 펼쳐진다. 파란 하늘아래 긴 시간을 건너오며 고스란히 보존되어 지금까지도 늠름히 서있는 성의 아름다운 모습을 한참동안이나 올려다 본다. 차가운 빗속을 뚫고 지나온 내게, 이 파란 하늘과 그 아래로 고스란히 보이는 성의 풍경은 귀한 선물같다.




마츠모토성의 바깥쪽 해자. 언제 비가 왔냐는 듯 파란하늘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바깥 해자를 건너서면 거대한 성문이 버티고 있다.





수비를 위해 진입한 공간을 포위한채 또 다른 거대한 성문이 둘러싸고 있다.





성문을 지나는 측면에는 보수공사에 사용되는 목재들이 널러 있다. 이 공사에 사용된 목재들은 140년 된 나무들을 사용한다는 알림판이 붙어있다.





성문을 지나서면, 성의 내부를 둘러싼 또 하나의  해자가 나타난다.





성 내부에서 보이는 천수각.





마츠모토성의 천수각은 일본 전국시대인 1594년에 세워진 건물로 일본에서 현존하는 성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국보로 지정되어있다.

검은색의 외벽과 날개를 닮은 지붕 때문에 까마귀성이라는 별칭이 붙어있다.





마츠모토성의 해자는 최대폭이 60m로 화살이나 조총의 사거리를 염두에 둔것이라 한다. 

대부분의 성들이 산지에 지어진 것에 반해, 이 마츠모토성은 평지에 해자를 파고 지어진 평성이다.




성의 내해자를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를 천천히 거닐어 본다. 성 내부는 벚나무와 여러수종의 수목들이 어우러진 공원으로 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천수각이 있는 내성으로 건너가기위한 빨간 목조교각이 인상적이다. 다리 건너서 부터는 입장료를 내야 출입이 가능하다.


▶ 일본의 성 : 링크




30여분 성내를 천천히 거닐다가, 다시 세탁소로 되돌아 온다. 건조가 조금 덜 된 상태라 다시 100엔을 넣고 건조기를 돌린다. 세탁소 구석을 보니 신발건조기가 있다. 다른 코인란도리에서는 못보던 기기다. 빗속에서 젖은 신발이 축축한 상태라 벗어서 건조기에 넣고 돌려본다. 20분 동안 100엔을 넣고 건조를 해봤지만 어림도 없다. 그래도 질퍽하던 신발이 절반 정도는 마른것 같다. 덜마른 신발을 끼어신고 마른 빨래를 정리하여 바이크 사이드백에 집어 넣는다.


세탁소에서 출발하기전 점심시간이 된터라, 바로 옆에 위치한 편의점에서 빵과 우유를 사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다. 그간 비닐봉투에 모아두었던 쓰레기를 편의점 쓰레기통에 버린다. 일본에서는 좀처럼 도로변에서 쓰레기통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캠핑등에서 발생하는 쓰레기들은 비닐봉지에 담아두었다가 편의점에 들릴때마다 잽싸게 처리하고 간다. 그러지 않으면 불법 투기를 해야하는데, 그러기에는 내 낯이 너무 얇다. 


편의점 바깥에 서서 빵과 우유를 먹고 있자니(일본 편의점은 실내 테이블이 아예 없다. 여행도중 딱 1번 설치된 곳을 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매장내 테이블이 존재하지 않는다. 컵라면을 산다면 보온병에 담겨있는 뜨거운 물을 부은 후 들고 나와서 주차장에서 먹어야 하므로, 이런면에서는 한국 편의점이 굉장히 편리하다.) 다시 하늘 한쪽이 시커멓게 변하면서 구름이 몰려온다. 얼마지나지 않아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변덕스러운 날씨다.




마츠모토 시내의 코인란도리(동전세탁소). 운동화 세탁 건조기까지 놓여 있다.

12번 - 운동화 세탁기, 13번 - 운동화 건조기





세탁을 끝내고 바깥으로 나서자, 또다시 하늘이 시커멓게 흐려지기 시작한다.




서둘러 다시 우의를 껴입고 출발한다. 마츠모토 시내를 우회하는 도로를 따라 달려간다. 우회도로 도중, 마츠모토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산기슭을 지난다. 떨어지는 빗방울 아래 너른 평야지대에 위치한 마츠모토 시가지가 시원스레 내려보인다. 조그마한 마을인줄 알았는데 나가노현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답게 제법 도시영역이 넓다. 19번 국도로 빠져나오자 빗줄기가 조금 약해졌다. 마츠모토시에서 도로를 따라 바로 이어지는 시오지리시를 지난다. 도로주변이 복잡하고 차량정체가 심한 도로다. 


국도를 따라 빼곡히 들어선 상가들과 대형상점들을 지나치고, 거대한 간판이 한 눈에 들어오는 엡슨 공장을 지난다. 차량이 가득한 복잡한 시가지길을 벗어나 본격적인 19번 국도의 길을 달려간다. 그러자 빗줄기가 더욱 굵어지기 시작한다. 비가 심해졌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고원을 달려 내려오던 아침과는 달리 대기가 그다지 차갑지 않다. 따가울 정도의 빗줄기가 달리는 앞으로 날아든다. 트럭과 차량 통행이 많은 도로인데다 비까지 내리고 있는라 더욱 조심스럽게 바이크를 몰아간다.


19번 국도를 따라 남하하는 길을 따라 멈추지 않고 달려가자 나고야까지 176km남았다는 거리판이 나타난다. 최북단에서부터 남쪽을 향해 주욱 달려온 길, 혼슈의 중간즈음을 넘어서서 위치한 나고야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것이다. 날마다 꿰맞추기의 조각같은 경로와 삶의 편린같은 거리를 달려 왔던것이 나고야를 알리는 이정표를 보고서야 얼마나 달려 온 것인지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여전히 비는 멈추지 않고, 슬슬 몸이 차가워지고 있다. 마츠모토시의 바로 남쪽에 붙어있는 시오지리 시가지로부터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19번 국도를 20km정도 달려 내려오자 꼭 들리고 싶었던 일본의 오래된 마을인 나라이 역참마을(奈良井宿,나라이주쿠, 숙박장으로 이루어진 마을)을 가르키는 간판이 보인다. 간판을 따라 오른쪽으로 꺽어 나라이주쿠 마을로 들어선다.


나가노현의 시오지리시에서 남서쪽의 기후현까지 이어지는 19번 국도는 에도시대(도쿠가와 막부가 정권을 잡은시기, 1603년 ~ 1868년) 수도인 에도(도쿄)를 중심으로 혼슈의 각지로 이어지던 다섯개의 주요 육상교통로(고카이도, 五街道) 중의 하나인 나카센도(中山道)의 일부분이다. 다섯개의 주요 교통로인 고카이도는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시대의 영남대로(서울~부산), 삼남대로(서울~전라,제주), 관동대로(서울~울진)에 해당하는 것이겠다. 옛길인 나카센도는 일왕이 있던 교토와 막부 정권의 중심인 도쿄를 이어주는 내륙의 길로써, 길을 따라 에도시대의 역참 마을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현재에도 복원되거나 보존된 역참마을들이 유명한 관광지로 변모하여 남아있다. 나라이주쿠도 나카센도의 오래된 역참마을들 중 한 곳이다.


비가 다시 시작되던 마츠모토 시가지에서 부터 두 시간 가량 빗속을 달려온터라, 적당한 처마밑에서 잠시 비를 피하며 체온이라도 되찾고  잠시 쉬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마침 나라이주쿠 역 건물이 보인다. 바이크를 역 가까이에 세워두고 처마 밑으로 몸만 뛰어든다. 헬멧과 젖은 장갑, 우의를 벗고 수건을 꺼내어 젖은 몸을 대충 훔치고 나니 차갑게 식은 몸의 온기가 조금씩 되돌아 오는것 같다. 역사건물의 벽면에 등을 붙이고 서서 멍하니 떨어지는 비를 구경한다. 지겹도록 봐오던 비가 분명하지만, 나라주쿠에 가득한 목조주택의 벽면을 적시며 떨어져내리는 비에서는 뭔가 다른 감성적인 냄새가 난다. 젖은 나무에서 나는 오래된 내음, 시간이 머금어진 고인 냄새, 그리고 비에 젖은 아스팔트를 머금은 나와 바이크의 냄새.




빗길을 달려 차가워진 몸을 잠시 쉬이기 위해 나라이주쿠역 건물의 처마 아래에 들어섰다.

오래된 목조주택이 가득한 나라이주쿠와 어울리게 목조로 지어진 역사건물이 마음에 든다.




나라이주쿠 역 처마아래에서 비를 피하면서 건너다본 도로 맞은편. 목조주택의 냄새가 희미하게 나고 멈추지 않는 비는 주륵주륵 내리고 있다.




자그마한 역사건물에 기대서서 비를 피하는 사이, 빗줄기가 약해졌고 몸의 온기도 고스란히 다시 되살아났다. 다시 바이크에 올라타고 느린 속력으로 나라이주쿠 마을의 거리를 따라 지나간다. 오래된 목조가옥들이 마을길을 따라 빼곡이 늘어서있다. 빗길을 뚫고 달려와 사백년 전으로 시간을 고스란히 거슬러 간 것 같은 기분이다. 내리는 비에 목조주택들의 음영이 짙게 풍겨오고, 길거리에는 오가는 사람이 전혀 없다. 고스란히 홀로 전세를 낸 것 같은 나라이주쿠의 도로를 따라 지나며 특별한 기분을 맛본다. 500미터 정도 이어지는 목조주택가의 가운데 즈음을 지나자 서서히 약해지던 비마저 그친다. 오후 다섯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라 날은 어둑해지고 있지만, 이리저리 둘러보는 역참마을 가운데에서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아차리기가 힘들다.


나라이주쿠 내부에는 오래된 건물의 민박집들도 꽤 있다. 투어링매플(바이크투어 가이드북)에서 추천하는 오래된 민박(여인숙)집에서 하룻밤 묶어가는 것도 운치가 있겠지만, 지금은 긴축재정 중이다. 민박에서 하룻밤 묵어가는 비용이면 캠핑으로 사흘을 지낼 수 있는 비용이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19번 국도로 다시 빠져나온다. 속도를 내어 국도를 달려가자 다시 빗방울이 약하게 떨어지기 시작한다. 무슨 놈의 날씨가 이리도 변덕스러운지 모르겠다. 내리는 비가 약하긴 하지만, 해가 진 후라, 슬슬 추워지고 있다.




에도시대 옛길인 나카센도(中山道)를 지나며 이어지던 역참마을 중의 하나인 나라이주쿠(奈良井宿)에 들어선다.





오래된 목조주택들로 가득한 나라이주쿠.

오후 늦은 시간에 비까지 내리고 있어서인지 오가는 사람이 전혀 없다.





전봇대나 전깃줄이 마을길 바깥으로는 전혀 노출되지 않게 관리가 되어 있는 곳이다. 그 때문에 드라마나 영화 촬영이 이 곳에서 많이 이뤄지고 있다.





나라이주쿠의 거리에 들어서자 끈질기게 내리던 빗줄기도 멈췄다. 천천히 마을을 어슬렁 거려본다.





길을 따라 1km정도 이어지는 이 나라이주쿠 거리는 국가 중요 전통 건조물군 보존지구로 선정되어 있다.





오후 늦은 시간이라선지 기념품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시멘트 도로와 철제 빗물 배출구만 아니라면 딱 몇백년 즘으로 되돌아간 듯한 분위기를 간직한 나라이주쿠.





비가 내려서인지 목조주택의 벽면이 더욱 짙은 음영으로 보인다.










이 마을에도 있을건 다있다. 우체국을 가르키는 이정표도 보인다.





마을길 한가운데에 위치한 샘물.

마을 이름에 우물 정(井)자가 들어가 있는 것에서 짐작 할 수 있듯, 나라이(奈良井)마을에는 여섯개의 샘물이 마을곳곳에 위치하고 있다. 






다른 역참마을과는 달리 거리를 따라서 차량통행이 가능한가 보다. 띄엄띄엄 세워진 차량들도 보인다.





나라이주쿠 마을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내려다 보이는 마을전경.
계곡 사이의 지형을 따라 만들어진 마을이다. 마을 우측 바로 옆에는 나라이강이 흐르고 있다.




지도를 확인해 보니, 20km 정도 떨어진 기소코마고원 부근에 오토캠핑장이 있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터라 서둘러 그 곳으로 향한다. 19번 국도를 한참 따라 달려와 기소초에서 못미친 곳에서 보이는 기소코마 고원이라 적힌 팻말을 따라 좌측으로 들어선다. 캠핑장을 알리는 표식이 부정확해서 4km가량 고원방향으로 들어서서도 한참을 헤매다가 외따로 떨어진 구석진 장소에서 겨우 캠핑장을 발견했다. 어두워져서 찾기가 더욱 힘들었다. 시간이 6시가 넘었다. 역시나 캠핑장은 몽땅 불이 꺼져있고, 사무소는 닫혀있으며 이용하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다.


일단 캠핑장 내로 들어가 적당한 장소에 텐트를 치고, 내일 아침 사무소 관리인이 출근하면 그때 접수를 하기로 한다. 내리는 비를 피할겸, 널직한 취사장 지붕 아래에 짐을 풀고 텐트를 친다. 취사장 벽면의 전기스위치를 올리자 형광등이 켜지고, 위안 같은 밝은 불이 들어온다. 다행스럽다.


텐트를 설치하고 필요한 짐들을 바이크 사이드백에서 꺼집어내고, 비에 젖은 우의와 신발을 정리하고 있는 사이 차량 한대가 캠핑장 내부로 들어와서는 내가 자리잡은 장소 인근을 왔다갔다 하더니 사라진다. 그러고나서 5분 즘 뒤에 관리소가 있는 아랫쪽으로 부터 불빛이 비춰지더니 사람 목소리가 들려온다. 관리인이다. 아까 잠시 왔다간 차량의 불빛이 관리인 아는 사람이었던가 보다. 지나가다가 불 켜놓고 무단으로 사용하는 나를 보고는 퇴근한 관리인에게 연락을 해줬던듯 하다. 


어둠속에서 불쑥 나타난 관리인에게 늦게 도착한 사정을 이야기 하고, 지금이라도 접수를 부탁한다고 하자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사무소로 이끈다. 사무소 입구 들어서기 전 우측의 공중전화를 후레쉬로 비추더니 전화연락을 하지 그랬냐고 한다. "일본어가 능숙하지 못해서요"라고 한마디 하고 어깨를 으쓱한 후 사무소로 따라들어간다. 1,050엔의 사용료를 지불하고, 잠시 일본일주를 하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자 관리인 아저씨 표정이 순식간에 온화하게 변한다. 굉장히 재미난 여행을 하고 있는것 같다며, 대단하다며 손가락을 지켜 세워준다. (뭐가 대단한건지 여행하는 나는 전혀 모르겠지만...) 온수 샤워실과 화장실 사용법을 알려주고 관리인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텐트를 펼쳐놓은 취사장 지붕 아래로 되돌아와서 보니, 벽에 '뱀주의, 나타나면 건드리지 말고 사무실로 곧장 알려주세요'라는 경고문이 기둥 여기저기에 붙어있다. 아무도 없는 캄캄한 숲속의 캠핑장이라 그렇지 않아도 싸아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그 문구를 보고나니 약간 오싹해졌다. 비가 내린 고원의 추운 기온 때문에 지금에야 뱀이 나올 일도 없겠지만 어쨋든 꺼림칙하다. 젖어있는 옷을 벗고 뽀송한 새 옷으로 갈아 입은 후, 저녁을 해먹고 자꾸만 싸늘해지는 산바람을 피해 텐트 속으로 들어간다. 


취사장의 양철 지붕 위로 호두알 같은 딱딱한 나무 열매가 가끔씩 '탕!탕!'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린다. 그런데 그 부딪히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한번씩 나도 모르게 깜짝 깜짝 놀란다. 그러다가 숲 속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라도 들려오면 머리가 쭈뼛하다. 외딴 캠핑장에서 야영을 했던 날들을 숱하게 거쳐왔건만, 이런 시설 좋은 캠핑장에서 왜 이런 불안정한 상태가 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루종일 비를 맞아 몸이 차가워져 허해진 탓일까. 몸 보신이라도 좀 해줘야 하는거 아닌가 모르겠다. 


늘 바라는 바이지만, 내일만은 비가 스탑! 햇볕 쨍쨍! 이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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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박지 : 기소코마 오토캠핑장(1박 1,050엔)

    - 취사장, 샤워실, 화장실, 나무데크

  

* 주유 : 576엔


세탁 : 1,000엔


* 이동거리 및 경로 :  105 km

 우츠쿠시가하라 현민의 숲 캠핑장 → 우츠쿠시가하라 고원미술관 → 마츠모토성 → 나라이주쿠 역참마을 → 기소코마 오토캠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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